Photography for HATCHIE’s pop-up installation.

The project envisioned an imaginary landscape where butterflies and small insects briefly pause, brought to life through sculptural food styling, a lotus tea pond, and collaborative nail art.


놀라울 정도로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이어져있다.

새벽 세시의 공항버스, 미어터지는 인천공항 제2터미널, 잘 쓰지도 않았던 카메라 배터리로 인한 첫 수하물 재확인, 세상에서 제일 먼 200번대 저가항공, 옴짝달싹 못하는 이코노미 세 시간을 견디고 홀로 도착한 타이중은 예상대로 눅눅하고 빈티지 냄새가 가득했다.
정말 작은 도시의 타이중의 시작은, 그래 솔직히 무서웠다. 대만의 대전이라더니 완전히 속았다.
지겨운 캐리어의 무게와 낯선 공기의 두려움을 웃음으로 덮어줄 동행자가 없는 여행은 오직 지독시리 진지한 나와 내가 느낀 감정만 있었기 때문이다. 잔뜩 긴장해 어깨가 굳어버린 28세 무직 겁쟁이 158cm의 여성은 낯섦을 유머로 넘길 여유가 한 톨도 없었다. 꼬롬한 음식 냄새와 낙후되고 습기 가득한 건물들은 두려움을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만들었고, 1보 1노숙자가 곁들여진 구시가지 동네의 호텔과 맛없는 미슐랭은 홀로 여행이라는 선택지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낯선 그들의 말을 나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 도시의 축축함이 낯설었다. 나는 그때 내 스스로의 선택이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도쿄나 갈 것이지 왜 타이중이었을까.. 왜 처음 와본 도시였을까.. 왜 이 호텔이었을까.. 왜 지금이었을까.. 왜 혼자였을까.. 멍하니 거리를 걸으며 우울한 비를 맞으며 곱씹었다.

하지만 맛은 없어도 탄수화물이 가득했던 미슐랭에서의 식사와 첫 시작이 찜찜하면 내내 찜찜하니 얼른 자리를 옮기라는 오빠의 말이 묘하게 내게 녹아들어 훌훌 털고 시작한 새로운 자리에서의 경험은 남은 여행을 충만함으로 가득하게 만들어줬다.
다시금 맡겼던 캐리어를 찾고, 새로운 숙소를 구하고, 멍청 비용을 놓아주고, 다정하지 않은 타이중의 도로와 나의 캐리어와의 밀당을 필라테스로 다진 근육으로 중재하고, 흐를듯한 약간의 눈물을 떨어지는 빗방울과 함께 정리했다. 이방인이라는 역할이 주는 즐거움을 위한 기회비용이라고 생각하며 뇌를 주무른 게 맞다.

여행을 떠나기 전 꼭 가고 싶었던 곳들은 Tcam (Taichung Art museum)과 동해대학교, 하고 싶었던 것은 유바이크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가는 로컬 카페에서의 커피, 러닝 후의 대만식 아침식사 정도였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내 스스로를 내가 참 잘 알았던 것 같다. 넉넉한 공간과 약간의 카페인이면 손쉬운 만족을 하는 단순함을 나는 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찾아봤던 길고 지루했던 3시간짜리 영화,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은 어쩌다 보니 마음 깊게 스며들었다. 가끔은 영화 자체의 감동보다, 영화를 바라본 나와 현상에 더 깊게 박힐 때가 있다. 하나 그리고 둘의 원제는 한 일 자 두 개를 쓴 ‘一一’ Yi Yi로 1 그리고 2가 아닌, 1 1인 셈이다. 아빠 말로는 화엄경, 즉 불교적 접근인 거 같다고 하는데 뭐 맞는지는 모르겠다. 영화는 제목을 이 숫자들을 상하로 배치하여 보여주는데, 한 일자 두 개가 아래 위로 배치되어 마치 한자 ‘二’를 쓴 것처럼 보인다. 즉 하나이면서 둘, 둘이면서 결국 하나인 것을 보여준다. 인간이라는 존재와 우리라는 관계가 삶과 죽음의 굴레가 놀랍도록 단순하게 설명되는 제목이다.
우리는, 그러니까 오빠와 나는, 돌림자로 한 일자를 쓴다.
동해대학교에 가만히 앉아 도대체 언제부터 자라기 시작해서 언제까지 살지 가늠조차 안되는 거대하고 푸르른 나무를 바라보며 일우 그리고 일영이를 낳아버린 엄마에게는 이 지독하게 닮은 두 존재가 둘이자 하나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잠겼다.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가 사랑에 빠져 낳아버린 두 개의 생명이 이렇게 다른 존재로 갈라지고 동시에 너무나 닮아있다는 게 묘했다.

​영화에서 어린 아들 양양은 자신은 타인의 전부를 보지 못하고 타인은 내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애늙은이 같은 말을 하는데, 양양의 아버지 NJ는 그럴 땐 카메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남기라고 조언해 준다. 우리는 같은 사실 앞에서도 다른 진실을 얻는다. 이 점이 나는 우리가 지독한 하나라는 것, 타인과 다르다는 것, 계속 변화하는 것에 대한 허무이자 위로로 해석된다.

사진을 찍으면 진실이 누군가의 사실로 남는다. 양양의 뒤통수 컬렉션이 위로가 되는 건 나의 사실 뒤 진실, 진실 뒤 사실을 내가 아닌 누군가는 본다는 안도감일지도 모르겠다. 홀로일 때는 전부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고, 타인을 바라보며 발견된 진실은 나를 설명하는 또 다른 나이다. 사랑이 나의 존재가 타인에게 투사되어 결국은 또 다른 나를 아는 과정이라는 점 또한 비슷한 맥락 아닐까나.





대만은, 특히나 타이중은 위치도 색깔도 사람도 참으로 애매모호하다.
일본 같으면서 중국 같기도 한 게 동남아인가 싶은 이 어중띤 나라는 나라는 어중띤 인간에게 딱이다. 면접에선 융복합 인재로 떠들어 제끼는 이 어중띤 인간은 이 애매한 도시가 너무 좋다. 대전 출신이라 그런 걸까? 달콤한 빵과 이도 저도 아닌 음식, 사투리도 아닌 것이 표준어도 아닌 말투가 나를 이렇게 만든 걸까? 아무튼 그 어떠한 관점에서 보아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편안한 자리는 여전히 친절했고 이런 나라를 좋아하는 나 때문에 이런 나를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라는 조그마한 희망도 생겼다. 돌아온 서울은 지독하게도 추웠다. 재빠르고 세련된 이 공항에서 회전 초밥이 된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이젠 난 서울시 광진구 주민이기에 이 애매함을 놓아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여행에서 그 어떤 다른 이득을 얻는단 말인가? 여기 아무런 꾸밈없는 벌거숭이의 내가 있다. 내가 간판도 읽을 수 없는 도시, 친근한 그 어떤 것도 다가들지 않는 이상한 문자들.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없고 오락거리도 없다. 이국 도시의 소음이 밀려드는 이 방에서 나를 불러내어 어떤 가정이나 좋아하는 장소의 좀 더 은은한 불빛 쪽으로 데려가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사람을 부를까? 그래 봐야 낯선 얼굴들만 내다볼 것이다. 교회들, 황금빛의 재단과 성향, 그 모든 것이 나를 밀쳐 내던지는 일상생활 속에서는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다 내 불안을 실감하게 한다. 그리고 이제 습관들의 장막, 졸고 있는 마음을 감싸 주는 몸짓들과 말들로 짠 보자기가 서서히 걷히고 마침내 불안의 창백한 얼굴이 노출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정대면 한다 – 나는 묻고 싶다, 그가 과연 행복한 것인지… 그러나 바로 그런 점에서 여행은 인간에게 깨우침의 빛을 던진다. 하나의 커다란 부조화가 그와 사물들 사이에 생겨난다. 전보다 덜 단단해진 마음속으로 세계의 음악이 더 쉽게 흘러든다. 마침내 그 거대한 헐벗음 속에서는, 덩그러니 서 있는 그냥 한 그루의 나무까지도 가장 정답고 가장 연약한 이미지가 된다. 예술 작품들과 여인들의 미소, 그들의 땅속에 뿌리박은 인종들, 수 세기의 과거가 요약되어 있는 고적들, 그것은 여행이 구성하는 감동적이고도 생생한 풍경이다. 그러고 나서 하루가 끝나면 다시금 내 마음속에 영혼의 굶주림처럼 무언가 깊은 공허가 느껴지는 호텔 방]

위는 카뮈의 안과 겉, 영혼 속의 죽음이라는 글의 한 부분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읽은 카뮈의 첫 책은 마치 운명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이건 네가 읽어야 할 부분이야라고 말하듯 곁에 왔다. 1936년 프라하에서 홀로 보낸 나흘 밤의 기록을 담은 글에서는 여행지에서의 낯섦과 두려움, 피곤함과 해방감, 불안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일찍이 식사를 마치고 8시 반이면 드러눕거나 글을 쓰는 카뮈의 이 행동이 삭막한 호텔방에 돌아와 피곤함에 지쳐 젖은 빨래처럼 누워있는 내 모습과 겹치는 게 괜한 동질감이 들었다. 카뮈는 수도원에서 느낀 침묵 속에서 해방감에 가까운 어떤 느낌을 맛본 후 위의 글을 단숨에 적었다고 한다. 이 카뮈의 과장 없는 있는 그대로의 글 속에서 이 여행에서 느낀 감정을 위대한 작가의 표현으로 얻을 수 있었기에 적어본다.